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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외교의 역사와 신오스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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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0BbnM367 작성일21-02-17 09:04 조회4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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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세 대륙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막강한 대제국 


오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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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강대했던 제국도


새로운 문물에 대한 자기 혁신에 실패하여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였고


*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 때 유럽국가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였지만, 그들의 병자로 전락한 이후에는 새로운 공포에 시달리는데, 바로 오스만의 멸망에 대한 공포였어


* 오스만이 멸망하면 그 이익을 러시아가 독점하여 유럽대륙의 세력균형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반대로 러시아도 오스만의 해체 후 달려들 다른 유럽열강들을 경계함)


* 오스만의 위기는 유럽 외교가에서 '동방문제'로 불렸으며, 유럽국가들간 복잡한 갈등을 야기하였고, 유럽의 병자는 이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이권을 뜯겨가며 그 생명이 연장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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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국의 운명은 1차 대전의 참전과 패전으로 인해 그 끝을 맺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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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스만 제국은 1차 대전에 동맹국의 편에서서 참전해야할 필사적인 이유가 없었음에도(경제적인 이해관계만 보면 오히려 연합군으로 참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는데, 오스만과 독일의 무역은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무역에 비해 미미한 규모였고, 바그다드 철도 부설과 관련된 독일의 투자문제도 프랑스보다는 덜 심각하였어)


오토 라만을 포함한 독일 외교관들의 노력과


원스턴 처칠의 삽질(드레노트급 전함 및 다수의 군함을 발주해 인수받을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국의 해군성 장관 처철이 일방적으로 먹튀)


그리고 친독파였던 실권자 엔베르 파샤의 독단으로 인하여 1차대전의 참화 속으로 끌려들어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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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결과는 


오스만 제국과 투르크인들에게 매우 큰 재앙이 되었어


오스만은 자신들의 가지고 있던 광활한 영토들을 상실하였을뿐만 아니라


투르크인이 거주하는 아나톨리아마저 연합국의 세력범위 등의 명목으로 거의 태반을 할양하였으며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양 해협, 마르마라해를 국제적으로 개방하고 


해협지대는 해협위원회의 관리하에 두며


군비는 소규모의 치안병력만 남기고 제한되는 것과 더불어


외국군이 주둔하고 치외법권을 부활되며


연합국 재정위원회가 재정에 간섭하는 


굴욕적인 조건에 서명해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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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투르크인들은 이러한 운명을 거부하기를 원했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무스타파 케말로서


1차 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으로


이스탄불의 구세주로 불리던


그는 이제 터키 독립전쟁을 이끌었어


케말의 뛰어난 지도력과 


그를 중심으로 단결한 투르크인들의 헌신적인 투쟁의 결과로


터키인들은 오늘날의 터키 영토를 확보하여


터키 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지


* 1922년 11월 1일, 술탄제 폐지 의결


*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 체결로 국내적으로 완전한 자주권 회복과 더불어 국제적 승인을 획득


*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 선포 수립 선포


* 1924년 3월 3일, 칼리프 제도 폐지(오스만의 마지막 술탄 와히데틴을 쫓아낸 이후 그의 사촌인 압둘메지드가 술탄으로서가 아닌 칼리프로서의 지위만 가진 채 상징적 존재로 옹립되었으나, 케말은 끝내 칼리프 제도마저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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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한 무스타파 케말에게 


한때 그가 충성하였던 오스만 제국은


극복되어야 할 구체제(김일성이나 이승만이 보던 '조선'과 같은)에 불과하였어


레판토 해전에서의 패전보다 칼리프직을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 


오스만의 쇠락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 그는


투르크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전에도 이미 위대하였다는 강조하였고


여섯개의 화살(공화주의, 민족주의, 국민주의, 국가주의, 세속주의, 개혁주의)


즉 케말리즘에 입각하여 


터키의 근대화를 추진하였지


* 케말은 근대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인 듀이를 초빙하여 근대적 교육제도를 수립하고,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도록 하였으며, 샤리아의 금지와 스위스식 민법의 도입, 일부일처제를 비롯한 양성평등의 보장, 복장개혁, 그레고리력의 도입, 많은 제철소, 조선소, 유리 공장,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는 등 조국의 근대화를 많은 업적을 남겼지


* 케말의 개혁이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비교를 통해 체감할 수 있는데, 터키가 일본, 프랑스, 스위스보다 먼저 여성참정권을 인정함


* 또한 케말은 1928년 아랍문자를 라틴문자로 대체하는 문자개혁을 발표하였는데, 본인이 직접 전국을 순화하면서 새로운 문자 시스템을 가르칠 정도로 이에 열정적이었음. 1927년까지 터키인 중 아랍문자를 독해할 수 있는 인구는 10%에 불과하였으나, 이러한 개혁의 실시로 현재 터키는 매우 낮은 문맹률을 기록해


* 문자개혁은 케말의 오스만 제국의 멸망 원인을 '백성들의 무지'때문으로 생각했던 것이 근본적인 동기였지만, 이러한 문자개혁은 동시에 세속주의 및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꾸란을 터키어로 번역하게 하고 아잔 소리 또한 터키어로 울려 퍼지게 하는(이 모든 것이 이슬람 율법과는 어긋나지만) 개혁 또한 실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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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말은 1차 대전과 터키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터키인의 아버지(아타튀르크- 1934년 가족법의 통과로 모든 터키인은 성씨를 가지게 되었는데, 케말은 이때 터키 국회로부터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받음- 사실 케말 또한 본명은 아니고 그는 수학에 매우 재능이 있던 학생이었는데, 군사중등학교의 수학교사가 그에게 완전무결이라는 뜻으로 케말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줌)가 되었지만,


그는 본래 오스만 제국의 1차 대전 참전에 반대했던 인물로


유럽의 전쟁에 잘못 끼어들어 패가망신한 


오스만의 사례는 케말에게 철저한 반면교사가 되었어


케말은 독립전쟁의 승전 이후 


흥분한 터키 군중이 그리스 국기를 짓밟자


그러한 행위를 금지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그의 명예를 존중한 성품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터키 공화국의 새로운 대외정책을 예고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어


케말은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혀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미래로 나아가기를 원하였고(보다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내부개혁을 진행할 터키로서는 대외적으로 평화의 관리가 중요했어)


터키 공화국의 모토는 


'조국에서의 평화, 세계에서의 평화'(Yurtta sulh, cihanda sulh)로 정해졌지


그는 고립된 국제정세 속에서 우선 같은 처지의 고립된 나라


소련과 우호조약을 맺었으며(이때 케말은 레닌으로부터 영토의 반환과 더불어 그들이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이권의 무효화를 확약받음)


또한 한편으로는 근대화의 원활한 추진과 소련의 영향력이 터키에서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는 목적으로 서방과도 관계 개선 또한 추진하여


국제연맹 총회의 결정에 따라 모술이 영국에 속하게 된 것을 인정하고 영국과 앵글로-터키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928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도 중립협정을 맺었고


그 한달 후에는 프랑스와 부채, 배상 문제와 관련하여 재정과 경제문제를 조정하도록 하는 조약을 체결하였어


1932년 터키는 국제연맹에 가입했고


1930년 이미 그리스와 국교를 회복하였던 케말은 1933년 그리스의 베니젤로스(역시 그리스에서 엄청난 존경을 받는 인물)를 터키로 불러 양국 간 동맹 체결에 합의하였으며


1934년에는 이 그리스와의 협정에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를 포함시켜 발칸협정으로 불리는 4개국의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어


그리고 그는 1937년 동쪽 변경의 안정을 위해 이란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함께 사아다바드 협약으로 불리는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함

 

* 이외에도 케말의 생전에 터키는 불가리아와 알바니아와도 중립협정을 체결


* 외교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던 케말의 노력은 결국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루스 양 해협에 대한 모든 주권을 상실했던 터키가 그곳의 관리국으로 인정받는 엄청난 외교적 성과로 보답받았어(이때가 1936년으로 그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던 히틀러는 이해에 라인란트의 비무장 지대를 재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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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케말의 이런 노력은 미래의 정세를 예측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어


그는 비록 이탈리아와 중립협정을 체결하고 리비아 독립운동 세력의 지원요청을 거절하였지만,


무솔리니를 자기 국민들의 손에 메달릴 놈(그리고 무솔리니는 실제로 매달린다 ㄷㄷㄷ)으로 평가하였으며


히틀러의 광기 또한 꿰뚫어 보았는데,


1931년 맥아더(우리가 아는 그 맥아더 장군 맞음)를 만나 베르사유 조약은 1차 대전의 원인을 하나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전당사국들간의 갈등을 심화시킬 뿐 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어


어쨌든 그는 작게는 무솔리니가 터키에 대해서도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던 것(그리스와의 동맹 및 발칸협정의 체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어)을 파악하였고


크게는 전 유럽대륙에 1차 대전과 같은 큰 전쟁이 멀지 않았음을 예측하였는데,


비록 그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모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고 


터키의 미래를 위해서 협력해야할 상대는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라고 생각하였음에도 


1차 대전 참전의 참혹했던 결과를 알고 있던


케말은 장차있을 대전쟁에서 터키가 '중립'을 지킬 것을 자신의 유지로 남겼지


* 케말 아타튀르크는 분명히 독재자였지만, 그가 독재를 하기에 매우 편한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모두 거부(사실 한때 그러한 체제를 터키에 도입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였어)하였던 것에는, 그의 생각에 터키가 배워야 할 국가는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었음과 더불어 공산주의나 파시즘과 같은 이념을 수용하는 것이 같은 이데올로기의 강대국에 휘둘려 터키를 전란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기 때문이야


* 아타튀르크는 유럽전쟁에 있어서 강대국들에 휘둘리지 말고 중립을 지킬 것과 더불어 터키의 동쪽 국경(지리적 의미의 동쪽을 말하는 것이 아닌 아랍과 페르시아를 의미)은 배울 것이 없으며 그곳에 끌려들어가는 것은 터키의 국익에 해가되는 단절해야할 곳으로 여겨(그 나라들과의 불가침 조약 또한 내심 이러한 의도 때문에 이뤄진 것이였어) 동방의 일은 국경의 방어에만 주력 해야한다는 견해를 가졌지


* 아타튀르크의 마지막 외교적 성과는 하타이와 관련된 것으로 하타이는 1차 대전 이후 프랑스령 시리아에 자치주 형태로 속했으나 프랑스는 1938년 9월 7일 하타이를 독립국가로 시리아와 분리함


* 프랑스가 식민지 영토를 포기한 것은 장차있을 유럽의 대전에서 터키를 자신들의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어


* 아타튀르크는 1939년 11월 10일 사망하였지만, 독립국가 하타이는 1939년 6월 29일 국민투표를 통해 터키 편입을 결정


* 국민투표를 통해 터키 편입이 결정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터키인 인구가 다수인 곳이었고 이 때문에 동쪽국경의 최대한 조용하기를 원하던 케말 또한 이곳만은 미수복지구로 생각하여 찾기를 원하였어


* 하타이의 터키명은 안타키야


* 반대로 시리아는 하타이를 프랑스 식민당국 때문에 상실한 자국의 '실지'로 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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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튀르크의 이런 뜻은 그의 충실한 계승자 이뇌뉘(여담이지만, 이뇌뉘는 혈통적으로 쿠르드인이야)에게 이어졌어


그는 하타이의 터키 편입을 묵인한 프랑스의 필사적인 외교적 노력과


전쟁 기간 동안 프란츠 폰 파펜을 파견한 독일의 끊임없는 외교적 구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립을 유지하였고


1차 대전으로 붕괴한 오스만 제국과 달리


터키는 2차 대전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지


* 터키의 지정학적 가치는 굉장히 컸는데, 만약 터키가 연합군의 편으로 참전했다면 독일은 부드러운 아랫배를 노출하는 꼴(연합군의 전투기들이 터키에서 출발해 더 깊숙이 독일 각지를 폭격할 수 있음은 물론 독일이 점령한 발칸반도도 위험)이었고


* 반대로 터키가 추축국의 편으로 붙었다면 연합군은 지중해 통제력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있었으며, 특히 소련의 경우는 캅카스쪽이 노출되어 바쿠 유전의 함락 또한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야


* 하지만 터키는 모든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내 중립을 지켰어(정확히는 얄타회담 이후 전쟁 극막바지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기는 했는데, 끝내 터키군은 2차 대전이 종결될 때까지 총 한 번 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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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이렇게 아타튀르크의 유지대로 2차 대전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전후 터키는 스탈린의 무지막지한 압박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 붉은 차르는 아타튀르크의 업적인 터키의 다르다넬스, 보스포러스 양 해협의 관리자로서의 위치를 무효화하고


그곳을 다시 국제통제하에 두고(그리고 이러한 국제통제라는 명목하에 소련군을 그곳에 배치할 것을 주장했어!)


터키의 영토 중 카르스와 아르다한이라는 자신의 젊은 시절 활약(은행강도로서...)했던 지역을 


다시 소련으로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지


이러한 위협에 터키의 선택은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이었고


트루먼 대통령이 그리스와 터키를 소수의 무장집단(공산세력을 의미)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인류는 냉전이라는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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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터키에서는 정권이 바뀌었고(이슬람적 성향의 정권으로)


새로 정부의 수장이 된 민주당의 멘데레스에게는 


소련의 위협이라는 안보적 현실과 함께 


자신의 지지기반인 농촌에 대대적 투자를 할 자금이 필요하였어


이러한 상황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멘데레스가 미국으로부터 안보는 물론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한반도에 대한 파병을 결정함으로써


터키의 서방진영 편입은 돌이킬 수 없게 됨


* 멘데레스의 파병결정에 케말리스트들은 강대국들이 개입된 전쟁에 중립을 당부한 아타튀르크의 유지를 어기는 것으로 반발하였어


* 하지만 멘데레스의 뚝심(처음에 파병에 반대하던 이뇌뉘도 멘데레스의 애국심을 인정하여 결국 파병을 지지해줌)과 더불어 6.25의 참전은 그들이 그토록 염원한 '서방세계 터키'에 결국 합치하는 방향이었기에 이러한 반대는 극단적으로 가지 않고 수그러들게 되었지


* 6.25 기간 중 터키의 나토 가입 또한 이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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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터키의 현대사는 수많은 정치적 갈등 및 세속과 종교의 갈등 그리고 쿠데타, 경제정책의 전환, 그리스와의 갈등(북키프로스 점령 등)을 포함하여


매우 복잡하게 진행되었지만,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어느 정권이 들어서던(비록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은 있었으나)


일관되게 친미반소의 형태를 띄었고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한 나토회원국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며


보다 완전한 서방세계로의 편입을 위해 EU 가입을 위해 또한 노력했어


* 저 유명한 쿠바 미사일 사태의 해결 또한 소련이 쿠바에 배치된 핵미사일을 회수하는 것의 반대급부로 미국이 터키에 배치한 주피터 핵미사일을 철수하는 조건으로 이뤄짐(제3차 세계대전이 임박했던 상황에서 그 해결을 위해 터키에 배치된 무기의 철수가 협상 카드로 등장할만큼 터키는 냉전의 최전선이었고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어)


* 터키는 물론 자국에 배치된 핵미사일의 철수에 반발하였는데, 미국은 그 대가로 터키를 위해 지중해에 SLBM이 탑재된 잠수함을 배치하여 그들을 달랬어


* 미국에게 터키가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로도 알 수 있는데,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4년 그리스가 키프로스를 침공하자 그리스 대사에게 대놓고 폭언을 퍼부으며 키프로스에서 철군을 강요함


* 일반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냉전기간 미국은 이스라엘 보다 터키에 더 많은 지원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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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끝나고도 터키의 외교정책은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견제하며 


동방이 아닌 유럽을 지향하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에르도안 정권의 등장은 이 모든 흐름을 바꾸어 놓았어


물론 터키의 완전한 서방세계 편입(EU 가입)의


'이슬람'에 대한 거부감과


터키의 여러 비민주적인 제도 및 낙후된 경제사정에 대한


유럽국가들의 회의감으로 인하여 지지부진해지자


에르도안 정권 이전에도 


일부러 동방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협상용'이었던데 비하여


에르도안은 보다 진지하게 


동방으로 접근하였으며


이것은


'신오스만주의'로 칭해짐


* 터키 세속정권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실 공정하지 못했고, 많은 아나톨리아 반도 주민들의 이에 대해 불만을 느꼈으며, 에르도안은 세속주의 정권들의 경제적 실정과 대비되는 자신의 경제성과와 더불어 종교적 감성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향수를 이용하여 견고한 지지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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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접근법이 처음부터 


지금 에르도안 정권이 보여주는


국제깡패적인 모습을 띈 것은 아니었어


처음에 신오스만주의에 형태는 


그동안 서방에 경도되었던 


터키의 외교를 


경제적 실리 등의 이유로 동방과도 친선 관계를 맺는다는 


충분히 납득가능한 이유로 이뤄졌으며


그 방식 또한 '제로 프라블럼' 정책을 통해


주변국들과 그 어떠한 문제도 만들지 않는다는 매우 평화적인 방식(마치 아타튀르크가 자신의 재임기간 과거의 적들을 포함하여 주변국들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온 힘을 썼듯이)으로 이뤄져


시리아, 이란과 같은 전통적인 적대국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서쪽(그리고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의 그리스와도 관계를 극적으로 개선하였으며


EU 가입을 위한 노력 또한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어(외교적 노력뿐만 아니라 에르도안은 그동안 터키의 EU 가입을 어렵게한 여러 비민주적인 요소들 또한 적극 개혁함)


* 미국은 처음부터 에르도안의 집권을 지지(이미 그가 총리로 선출되기도 전에 부시행정부는 그를 워싱턴으로 초청해 그의 선거운동을 도왔어)했으며, 에르도안은 한동안 미국과도 견고한 동맹관계를 유지했지


* 에르도안은 초기에는 쿠르드족을 상대로 무력사용을 자제하고 꽤 진지하게 평화협상에 임했으며, 심지어 과거 터키군이 자행했던 데르심 학살에 대해서 사과하기도 하였어


* 약소국 아르메니아에 대해서도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 에르도안 정권은 그래도 이전정권들 보다는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띄었으며, 2010년에는 악다마르 성당을 정부재정을 투입하여 95년만에 재건하여 십자가도 세워주고 예배를 허용했을뿐만 아니라 2013년부터는 매해 아르메니아 대주교의 방문 및 예배와 같이 청소년 세례식 또한 허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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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10년간의 에르도안 정권은 


터키가 무디스로부터 20년만에 투자적격 등급을 받게하고


평균 7.3%의 높은 성장률과 더불어 살인적이었던 인플레이션을 잡았으며


국가부채 또한 국내총생산의 100%에서 30%까지 하락시키는


부정할 수 없는 경제적 성과를 이뤘어


이러한 무능했던 과거정권들과 대비되는 경제적 성과와 더불어


적어도 겉으로는 민주적으로 변모해가는 터키(이것은 실상과 다른 부분이 많았지만, 한동안 대외적 이미지는 서방과 동방할 것 없이 이러하였지)


그리고 오랜 적대국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평화공존을 도모하는 모습을 통하여


에르도안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신임을 받았을뿐만 


아랍의 봄이라는 역사적 현장에서


터키는 아랍의 젊은이들에 롤모델로 추앙받았지(미국 또한 아랍국가들에게 터키를 배울 것을 권하였어)


image.png 터키 외교의 역사와 신오스만주의

하지만 에르도안의 견고한 집권기반을 갖추고


또한 힘을 기른 터키가 대외정책에 그 힘을 투사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모든 것은 바뀌었어(좀 더 정확히는 그 동안 가려졌던 진실들이 들어났고, 예고된 비극이 다가왔지)


에르도안은 본래 야당 당수 시절에 민주주의를 이슬람주의라는 역에 도착하면 내려야 할 열차에 비유한 수준의 인물이었고


2013년 터키 반정부 시위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으로


세계에 그 실체가 드러난 에르도안 정권은 


처음 10년간 보여줬던 경제성과(에르도안 정권의 경제성공에는 경제부장관과 경제부총리를 역임한 알리 바바잔과 같은 유능한 인물의 도움이 컸는데, 에르도안은 그를 숙청함- 현재 알리 바바잔은 반에르도안파이며, 이후 에르도안은 자신의 사위를 재무장관에 임명하기도 ㄷㄷㄷ)와 달리


여러 삽질을 거듭하여 그 경제성과가 무위로 돌아감에 따라


그에 대한 대응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쿠르드족에 대한 진압활동을 넘어서서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명목으로 


서방세계와 대립하고 중동의 각종 분쟁에 개입하게 되었어


image.png 터키 외교의 역사와 신오스만주의

신오스만주의와 관련하여 에르도안의 외무장관 이었던 다부토글루(그 역시 알리 바바잔처럼 쓰임이 다하자, 숙청당하여 현재 반에르도안파로 활동)는 


발칸을 되찾아야할 땅으로 언급하기도 했고


에르도안 정권은 현재 그리스에도


그들의 EEZ내에서 천연가스를 시추하겠다는 등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고 


메르켈, 마크롱을 비롯하여 서방국가의 지도자들에 대한 


그의 말폭탄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사실 에르도안 정권이 폭력성이 말이 아니라 총으로 표현되는 곳은 


아랍세계로 


그의 신오스만주의에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당사자들 또한


서방인들이 아니라 아랍인들이야


물론 말폭탄은 아랍국가의 정상들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에르도안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터키군의 철군을 요청한 


이라크 총리의 국제법적으로 너무도 정당한 요청에 대하여


이라크 총리를 '너'로 지칭하면서 너와 나는 대등하지 않다는 상식 밖의 대답을 하였는데,


문제의 본질은 말폭탄이 아닌 동방세게에서 에르도안의 터키에게 


국제법이라는 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


image.png 터키 외교의 역사와 신오스만주의


에르도안 정권은 러시아, 이란, 이스라엘, 미국, 사우디 등과 함께


중동의 대표적인 '폭력적 플레이어'로서 활약(!)하고 있는데,


에르도안 정권은 


노골적으로 영토확장을 주장함과 동시에


시리아 내전, 리비아 내전에 개입하고


상술하였듯이 이라크의 영토에 또한 그 정부의 의지와 상관없이 터키의 군대가 있으며


카타르와 다른 아랍국가들의 분쟁에도 개입하여


카타르에 또한 터키의 군대를 파병하였으며


'무슬림 형제' 팔레스타인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은 물론


무슬림 형제단 정권을 전복시킨 이집트의 엘시시 군사정권과도 대립을 이어가고 있고


아프리카에 까지 터키의 영향력을 투사하여


수단정부(쫓겨난 독재자 바시르)로부터 


수아킨 섬을 99년간 임대받기도 하였어(사우디 언론은 이에 대해서 터키의 아프리카 대륙을 향한 탐욕은 끝이 없다고 비판함)


+ 최근에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의 개입하여 아제르바이잔의 승리를 도왔지


image.png 터키 외교의 역사와 신오스만주의

신오스만주의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지정학적 이유, 경제적 이유, 자원의 중요성 또 오스만 제국의 역사까지 소급하여 여러 설명을 하지만,


신오스만주의에 본질은


에르도안의 정권유지를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어


물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의 개입은 BTK 철도선 및 자원파이프 라인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리비아 내전은 동지중해의 자원을 둘러싼 패권다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의 사실이야


이외에도 카타르와 터키의 관계 등 


터키 또한 기왕 중동문제에 개입하는 김에 경제적 이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터키의 외교정책은 일관되게 


역내의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것에 있으며


이 과정에서 신오스만주의와 같은 구호가 동원되었는 것 또한


엄청난 재정이 소모되고 터키의 아들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이러한 개입에 대한


국내적인 반발을


오스만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여 달래려는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진실에 부합할 거야


* 오스만 제국은 국경안에서건, 밖에서건 광신적인 종교세력을 지원하지 않았으며, 더더욱 그러한 세력을 지원하는 것을 '국익'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image.png 터키 외교의 역사와 신오스만주의

그리고 이런 에르도안의 이슬람주의 육성을 위한 국제적인 개입은


터키 국민들에게도 재앙이 되었는데,


터키는 시리아 내전의 개입 과정에서 러시아 전투기를 격추하여 러시아로부터 제제를 받고(작성자는 이를 터키가 고의로 격추했다고 보는데, 아사드 정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국제적 합의가 도출될 것으로 예상된 회의를 일주일 남기고 참으로 묘하게도 러시아의 전투기가 추락했기 때문이야)


미국과도 무역전쟁을 치뤘으며


사우디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2020년 터키의 대사우디아라바이아 수출은 92%가 감소하였어


하지만 무엇보다 터키 국민들에게 가장 큰 재앙은


에르도안의 바샤르 알 아사드 세속주의 정권(+ 에르도안의 입장에서는 이단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무리한 개입의 대가에 따른


엄청난 인구의 시리아 난민의 유입으로


이러한 거대한 난민인구를 에르도안은


유럽을 협박하는 무기이자


잠재적 표밭(에르도안은 300만에 달하는 시리아 난민에게 터키국적을 주려고 하였는데, 이는 2016년 쿠데타의 직접적인 명분이 됨)으로 생각하지만,


시리아 난민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치안의 극적인 악화를 경험하는


터키 국민들에게는 난민은 자신들의 생계와 안전을 위협하는 침략자로 여겨지고 있어(이슬람주의세가 강하고 에르도안에 대한 지지가 높은 동부지역에서조차 터키인들의 난민에 대한 여론은 매우 비우호적)


* 외교안보적으로도 이러한 개입은 터키의 입지를 더욱 악화시키고 터키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 뿐인데, 터키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대형테러는 물론, 터키는 미국에 의해 F-35 공동개발국에서 쫓겨났고(이는 직접적으로는 러시아로부터의 S-400을 도입하는 문제때문이지만, S-400의 도입 또한 터키의 중동개입에 대한 러시아의 양해를 받아내는 것과 관련이 있어), 정권에 위협이 되는 이슬람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에르도안의 신오스만주의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아랍국가 지도부들의 터키에 대한 경계심을 극도로 자극하여 아랍국가들의 이스라엘과의 화해(사우디와 이스라엘의 비공식적 관계 개선 및 이스라엘과 UAE, 바레인의 수교 등)를 촉진하는 등 고립되는 것은 터키이며, 그 수혜자는 되려 이스라엘이 되는 형편이야(물론 아랍국가들의 이스라엘과 화해하는 더 큰 이유는 이란에 있지만, 과거 그들을 지배했으며, 이슬람주의에 보호자가 되어버린 터키에 대한 경계심 또한 이러한 정책결정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지)


* 즉 경제나 자원, 오스만 제국의 향수와 같은 것은 모두 부차적인 것으로 본질은 에르도안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터키의 국력을 소모해가면서까지 지원하는 것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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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국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전가시키면서까지


에르도안 정권의 해외 이슬람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것은


에르도안에게 있어 그것이 자신의 정권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어지고 있기 때문이야


상술하였듯이


한때 그의 든든한 카드였던 경제에서 


그가 더 이상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됨에 따라(한때 유능했던 경제관료의 보좌속에 국제적으로도 모범적 사례로 평가받던 경제개혁을 이뤘던 에르도안이지만, 이후의 그는 고금리가 물가를 상승시킨다는 경제학적 기본상식에 배치되는 괴상한 주장에서부터,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면 그에 대한 근본적 처방 대신 '먹거리 테러리스트'들이 나타났다며 국민을 갈라치기하여 책임을 모면하는 데 급급하고 있어- 이 먹거리 테러리스트들과의 투쟁을 위해 에르도안은 반값 채소를 내세운 150개의 직영 가판대를 열었는데...이 때문에 터키에서는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보던 배급을 기다리는 긴 행렬을 볼 수 있었지- 물론 이에 대한 시민들의 만족도는 최악이었으며, 많은 테러리스트들(자영업자, 농민)이 희생양이 되어 도산했어)


국민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과 함께


대외 개입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정권의 수호와 연관되는데,


세속주의에 전통적 수호세력이었던 군부와 관련해서


터키의 장병들이 이슬람주의에 편에 서서


세속주의 세력들과 싸우게 함으로써


그들의 '주적관'을 변화시키는 효과와 함께


중동 각지에 산재되어 있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안보가 


곧 그의 정권이 안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 무슬림 형제단의 무르시가 군부 쿠데타로 쫒겨날 수 있는 세상은 곧 에르도안 또한 그러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에, 에르도안은 필사적으로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하고 엘시시를 비난하는 것이지


* 그리고 이러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의 블록을 이룬다면 유사시에  그들이 에르도안을 지켜줄 수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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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터키보다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78만 제곱 킬로미터의 면적에 갇혀 있을 수 없다" - 2016년 에르도안의 연설


안타깝게도 


많은 나라의 정치인들에게


국익보다 정권의 이익이 큰 경우가 있으며


에르도안에게 정권의 이익은 터키의 국익보다 크다는 것이


글의 결론이 되지 않을까 싶어


* 물론 에르도안 이외의 다른 중동 플레이어들, 누가뭐래도 오늘날 중동의 혼란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미국의 역대 행정부, 블라디마르 푸틴, 베냐민 네타냐후, 무함마드 빈 살만, 하메네이 등 또한 많은 경우 에르도안만큼 나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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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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